원문: The Limits of China’s Market Reforms under Communist Party Rule (게재일: 2026년 9월 19일)
8월 12일 주룽지(朱鎔基) 전(前) 중국 국무원 총리가 사망하면서 그의 경제 업적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주룽지는 부총리 시절 중국 본토의 경제정책 상당 부분을 총괄했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으며, 1990년대 시장지향 개혁의 핵심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유기업을 구조조정하고 중앙정부의 재정 역량을 강화했으며 주택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국내 기업을 더욱 치열한 경쟁에 노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 본토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활용했다.
그러나 주룽지를 시장개혁가로 기억한다면 더욱 흥미로운 질문이 제기된다. 그가 실제로 이해한 시장경제란 어떤 것이었는가?
이를 살펴보는 데 유용한 비교 대상은 자오쯔양(趙紫陽)이다. 자오쯔양은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총리를 지냈고, 이후 198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맡았다. 그는 마오쩌둥 사후 첫 10년간 진행된 경제개혁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기업 자율성 확대, 정부 지정 가격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중가격제로 전환, 시장 역할의 확대를 주도했다. 그는 천안문 시위대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가 1989년 권좌에서 축출되었으며,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다.
자오쯔양과 주룽지는 모두 마오쩌둥식 중앙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시장과 국가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주룽지는 강력하고 유능한 당국가 체제 아래에서 시장이 작동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자오쯔양은 특히 가택연금 기간에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계속 시장에 우호적이기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는 시장경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더욱 근본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자오쯔양: 계획경제의 개혁에서 국가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자오쯔양은 집권 당시 결코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가 널리 알린 구상은 국가가 시장을 규제해야만 하고 시장이 기업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여전히 시장 위에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자오쯔양의 생각은 이미 전통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훨씬 넘어선 상태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례적으로 분명한 자료도 남아 있다. 자오쯔양이 1988년 베이징에서 밀턴 프리드먼과 이러한 문제들을 직접 논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산권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며, 가격개혁은 한낱 관료에 의한 가격조정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실패한 기업을 새로운 기업이 대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파산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은 국가가 “시장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오쯔양의 지속적인 믿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경제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오쯔양의 생각은 1989년 이후에도 계속 발전했다. 그의 후기 견해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1차 자료는 『국가의 죄수: 자오쯔양 총리의 비밀 일기』다. 이 책은 자오쯔양이 가택연금 중 비밀리에 녹음한 약 30시간 분량의 음성 기록을 바탕으로 편집되었다. 말년의 자오쯔양은 경제개혁을 확고히 보장된 재산권, 법치주의, 정보의 자유, 사법부의 독립, 그리고 점차 정치개혁과 긴밀하게 연결했다. 생을 마감할 무렵 자오쯔양은 의회민주정이 현대 중국 본토 정치체제에 가장 실현 가능한 제도적 틀을 제공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중대한 사상적 전환이었다. 문제는 더 이상 단순히 계획경제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권력이 시장경제의 기반이 되는 제도들을 무력화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였다.
주룽지: 더 강한 국가를 통한 시장 구축
주룽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경제사상은 그가 이끈 정부의 정책뿐 아니라 『주룽지 발언 실록』과 『주룽지, 기자에 답하다』에 수록된 연설과 대담을 통해서도 재구성할 수 있다.
주룽지를 단순히 계획경제의 옹호자로 묘사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의 지도 아래 시행된 일부 개혁은 낡은 사회주의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경제학자 니컬러스 라디에 따르면, 주룽지가 총리로 재임한 첫 4년 동안 도시 국유부문 취업자 수는 약 3,400만 명 감소했다. 주룽지는 WTO 가입 역시 국내 기업들이 국제경쟁에 정면으로 맞서도록 강제하는 장치로 여겼다.
그러나 주룽지는 전면적인 민영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흔히 “큰 것은 붙잡고 작은 것은 놓아준다”는 [역자주: 조대방소(抓大放小)’로] 요약되는 정책 아래에서 많은 소규모 국유기업이 매각·합병·이전되거나 폐쇄되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진 부문의 대기업들은 국가의 소유로 남았다.
1994년의 조세분담(分稅制) 개혁은 이러한 철학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개혁은 전체 재정수입에서 중앙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을 급격히 높였고, 베이징 중앙정부가 국가 경제정책을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을 재건했다.
이것이 주룽지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는 시장을 믿었지만, 동시에 시장을 구축하고 규제하며 규율할 수 있는 강력한 기술관료적(테크노크라트) 국가도 믿었다.
쉬청강과 제도의 문제
경제학자 쉬청강(許成鋼)은 이러한 차이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데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한다.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쉬청강은 현재 스탠퍼드대학교 중국경제제도연구센터의 선임연구원이자 후버연구소의 객원 연구위원이다. 이전에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와 홍콩대학교, 칭화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쉬청강은 널리 인용된 2011년 『경제문헌저널』(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논문에서 개혁기 중국 본토의 체제를 “지역적으로 분권화된 권위주의”라고 규정했다. 인사에 대한 정치적 통제는 중앙에 집중된 채 유지되었지만, 지방정부는 경제활동에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중앙의 정치적 독점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지역 차원의 실험과 경쟁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쉬청강은 최근의 저서인 “제도적 유전자” 연구에서 이 주장을 한층 발전시킨다. 이 개념에 따르면 몇몇 근본적인 제도 요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스스로를 재생산하면서 이후 제도의 진화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정책은 크게 달라질 수 있지만, 정치적 권위와 재산을 규율하는 더 깊은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주룽지는 당국가 체제의 제도적 유전자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도 수많은 경제 메커니즘을 변화시켰다. 가격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민간기업이 성장했으며 외국인투자가 증가했다. 국영기업은 더욱 강한 경쟁에 직면했고 중국 본토는 WTO에 가입했다. 그러나 인사, 금융, 주요 국유자산, 사법부, 정치조직에 대한 최종적인 정치권한은 여전히 중국공산당 체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오쯔양의 후기 사상은 이러한 더 깊은 문제를 인식하는 데 가까워졌다. 만약 재산권이 현재 정치지도자들이 그것을 존중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온전히 보장된 재산권이 아니다. 법원이 궁극적으로 정치권력을 제약할 수 없다면 계약은 여전히 정치적 판단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정치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지도자가 이전의 개혁을 뒤집는 것을 막을 신뢰할 만한 장치도 없다. 그 순간 경제개혁은 헌법적 문제가 된다.
썸네일 출처: https://m.go.seoul.co.kr/news/international/china/2014/08/11/20140811011011?cp=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