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ana Mercer * 일리아 머서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칼럼니스트이다. 유대인으로 5세부터 19세까지 이스라엘에서 살았고 이스라엘의 징병제를 거부하였다.

주제 : #세계사 원문 : The Real Israel vs. Hasbara History (게재일 : 2025년 5월 28일 ) 번역 : 김경훈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그렇다면 이스라엘 국가는 범죄 주체라면 미국은 무엇인가?

가자·서안·레반트 전역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 전쟁은 곧 미국의 전쟁이다.

좋든 싫든, 가자는 우리의 학살이다.

“가자는 미국의 국익과 무관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지만, 이제 그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미국은 개입주의 헤게모니스트다. 이스라엘을 은밀하게 지원하며 가자에서 벌어진 말살 캠페인에 가담·방조했다. 국가 이익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실용주의의 전제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논리로 이어진다: 가자 주민과 이라크인의 학살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면, 국익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정당하다.

즉, 미국 정부가 학살을 국익이라 여겼다면, 학살은 미국의 신성한 권리가 된다.

물론 학살은 외교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다.

가자 홀로코스트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원은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기이한 사건이자 결정적 장면이다.

미국 외교정책이 수많은 참혹함의 전시장이라면, 가자는 그 정수다. 왜 과거의 외교적 악행들과 다른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미국 외교정책은 주로 ‘정권 교체’에 집중했고,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는 부차적으로 다루며 은폐했다.

미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세계를 각성시키기 위해, 즉 ‘미국의 이미지’로 세계를 재창조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 왔다. 또한 세계를 이스라엘에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려 했다.

미국의 외교 틀 안에서 대량 살인은 ‘세계의 계몽’이라는 계획의 일부로 여겨졌다. “우리처럼 되지 않으면 죽인다”가 요지였다.

그러나 가자에서는 미국이 살인을 위해 살인에 동참했다.

가자에서, 미국은 마침내 모든 보편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미국이 가자에서 승인·지원한 것은 21세기 홀로코스트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스라엘이 미국 내에서도 급진적인 윤리적 변화를 실행했다. 일부 기독교 종파는 이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평화의 계명을 제치고 AIPAC(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의 명령을 따른다.

하지만 당신이 하는 짓이 곧 당신이 누군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그 행위와 그 의도로 인해 학살 범죄 집단이다. “반유대주의자”나 “테러 동조자”들이 학살을 비난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고 말씀하셨다.

하스바라의 또 다른 목적은, 이스라엘 방위군이 가자·서안·동예루살렘의 민간인을 전멸시키는 작전을 ‘전쟁의 부산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용맹한 전사가 벌이는 정당한 전쟁의 부수적 현상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전쟁범죄로 포장하면, 학살은 “전쟁터에서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라는 식의 변명거리가 된다.

하지만 가자에서 이스라엘은 전쟁이 아닌 학살을 벌였다. 학살을 전쟁처럼 포장하는 것은 순전한 하스바라다. 학살은 전쟁이 아니다.

학살을 전쟁범죄로 보는 것은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제공한다. 학살을 전쟁범죄에 포함시키면 법적·도덕적 변명이 붙을 여지가 생긴다.

학살은 별개의, 어떤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 만악의 죄다.

물론 비국가 저항 전투원들의 비대칭전이 이스라엘 학살 일부를 저지했으나, 점령자와 피점령자 간 권력 불균형은 압도적이다. 조직화된 저항이 있다고 해서 학살이 전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국가와 사회 모두—가 가자 지구와 주민들에게 저지른 일을 분석했다.

그렇다면 가자의 사람들, 살아남은 이들과 순교자들이 무엇을 이루었는가? 많은 것을 이뤘다.

바깥에 억류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서구의 독선적 선전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도덕적·군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부패한 세력으로 보게 만들었다.

가자 학살은 분명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팔레스타인인의 대의를 정당화했다.

도덕적이고 이성적 인간이라면, 이 지역 역사를 많이 알지 못해도 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놀라운 모순을 보아 왔다. 이스라엘은 학살을 부정하면서 공개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할 권리가 자연권이라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특권적·보호받는 일탈자로서 존재하기를 요구하며, 마치 온 세상의 축복과 면죄부를 받은 양 악행을 저질렀다.

생생히 벌어지는 학살 속에서, 범죄 주체인 이스라엘은 스스로에게 살인하고 기만할 권리가 있다고 우긴다. 이 얼마나 뻔뻔한가.

그럼에도 부질없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악행은 폭로되었다.

인종 학살(ethnocide), 인구 말살(depopulation), 주거 말살(domicide)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어떤 면죄부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이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우기는 것은, 가장 기괴한 모순이며 인간 이하의 일탈이다.

이스라엘은 우리 모두에게 사기와 기만을 저질렀다.

호페적 논증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그 자체를 무효화할 수 있는 것처럼, 팔레스타인인의 현실을 검증하는 데에도 같은 논증을 응용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수십 년간 자신들의 현실을 이야기해 왔고, 그들이 말해 온 것은 모두 진실이었다.

이스라엘이 TV쇼마냥 자행한 학살은 팔레스타인인의 현실—그들의 분노와 저항권, 보상받을 권리—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수십 년간 “살인자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살해당하고 약탈당하고 있다”고 말해 왔다. 이러한 그들의 현실은 10월 7일 이후 돌이킬 수 없이 입증되었다.

이제 만약 이 가자 학살을 옹호하는 이들이 이 현실을 부인한다면, 그들 또한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체험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들의 ‘진실’을 깨닫게 될 때까지.

구체적으로, 벤 샤피로, 베어리 와이스, 바이든, 네타냐후, 블링컨, 더글러스 머레이, 데니스 프래거 등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을 점령된 가자로 떨어뜨려야 한다. 그들이 직접 전차가 다가오는 가운데 돌덩이 틈을 헤치며 달아나고, 떨어지는 미국산 폭탄의 살상 반경을 피하다가 목숨을 잃게 해야 한다.

우리의 카메라는 이들 부정론자를 기록할 것이다. 작동하는 단 하나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수천 명이 줄 서 있는 모습, 오물과 피에 뒤범벅된 몸으로 병원 바닥에 누워 지독한 설사와 패혈증에 시달리는 모습, 마취제도 없이 삽관·절단·제왕절개 수술을 받는 모습, 머리 위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이스라엘용 쿼드콥터 드론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는 모습까지.

이제껏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고통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 모두가 이스라엘을 두고 불쌍하다고 통곡을 했다. 난 여기서 남부 문학 속 한 인물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 난 신경도 안 써!”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우리는 학살 가해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처벌이 이루어지고, 보상과 배상이 영원히 회복될 때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을 멈춰선 안 된다.


썸네일 출처 :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56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