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철학 
원문: The Death Wish of the Anarcho-Communists
번역: 전계운 대표


신좌파가 과거의 느슨하고 유연하며 비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버린 지금, 신좌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스탈린주의와 아나코-공산주의라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이론적 지침으로 채택하고 있다.

불행히도 마르크스-스탈린주의가 SDS(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을 장악해버렸지만, 아나코-공산주의는 스탈린주의 노선이 보여준 관료주의적-국가주의적 폭정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하고 있는 많은 좌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 방식과 그 행동에 동참할 동지들을 찾고 있는 많은 리버테리언들은 자발적인 방식을 옹호하고 강제적인 국가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무정부주의 신조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특정한 전술적인 행동속에서 동맹을 모색하다가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쿠닌-크로포트킨의 원류 형태와 현재의 비이성주의적 및 "포스트 희소성(Post-Scarcity )"1) 변종 모두를 포함하는 아나코-공산주의는 진정한 리버테리언 원칙과는 극과 극으로 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아나코-공산주의가 국가보다 더 증오하고 비난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유 재산권이다. 사실, 아나코-공산주의자들이 국가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국가가 사유 재산의 창조자이자 보호자라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재산을 폐지하는 유일한 길은 국가 기구를 파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가 언제나 사유 재산권의 거대한 적이자 침해자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자유 시장, 손익 경제, 사유 재산, 물질적 풍요ㅡ이 모든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임ㅡ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아나코-공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를 공동체 생활, 부족 간의 공유, 그리고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마약과 록 음악 중심의 “청소년 문화”의 다른 측면들과 잘못 동일시하고 있다.

아나코-공산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스탈린주의와는 달리 그 형태의 공산주의가 아마도 이론상 자발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추측건대, 아무도 공동체(코뮌)에 가입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개별적으로 생활하고 시장 활동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나코-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구상하는 미래의 무정부주의 사회의 윤곽에 대해 언제나 극도로 모호하고 불분명한 태도를 보여 왔다. 그들 중 다수는 아나코-공산주의 혁명이 모든 사유 재산을 몰수하고 폐지해야만, 모든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재산에 대한 심리적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극도로 반(反)리버테리언적인 교리를 주장해 왔다.

나아가, 1930년대 내전 기간 동안 스페인 아나키스트들(바쿠닌-크로포트킨 유형의 아나코-공산주의자들)이 스페인의 광범위한 지역들을 장악했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모든 돈을 몰수하고 파괴했으며 화폐 사용에 대해 즉각 사형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잊기 어렵다. 이러한 사실들 중 어느 것도 아나코-공산주의의 선하고 자발주의적인 의도에 대한 신뢰를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없다.

다른 모든 근거들에서 볼 때, 아나코-공산주의는 장난스러운 수준에서 터무니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신조는 개성과 이성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다. 사유 재산에 대한 개인의 욕구, 자신을 발전시키고, 전문화하며, 이윤과 소득을 축적하려는 동기는 공산주의의 모든 분파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 대신, 모든 사람은 공동체들에서 살며, 자신의 모든 빈약한 소유물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각자가 자신의 공동체 형제들보다 앞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모든 형태의 공산주의의 근저에는 개인적 비상함에 대한 깊은 증오, 일부 사람이 타인에 비해 더 갖고 있는 자연적 또는 지적 우월성을 부정하는 태도, 그리고 모든 개인을 공동체의 개미집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가짜 "인본주의"라는 명목 아래, 비이성적이고 극도로 반(反)인류적인 평등주의가 모든 개인에게서 그 고유하고 소중한 인간성을 빼앗으려 한다. 

나아가, 아나코-공산주의는 이성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결과물들인 장기적 목적, 선견지명, 근면, 그리고 개인적 성취를 경멸한다. 대신에 이 모든것을 “자유”라는 명목하에 비이성적인 감정, 변덕, 그리고 일방적인 욕망을 찬양한다. 아나코-공산주의자의 "자유"는 타인에 대한 침해나 방해가 없는 진정한 리버테리언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비이성, 성찰되지 않은 변덕, 그리고 유치한 기분에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자유”일 뿐이다. 사회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아나코-공산주의는 하나의 재앙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아나코-공산주의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아나코-공산주의자는 화폐, 가격, 고용을 폐지하고자 하며, 순전히 어떤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필요"를 자동으로 등록함으로써 현대 경제를 운영할 것을 제안한다. 경제학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단 1초도 이 이론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50년 전,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계획 경제와 화폐 없는 경제가 가장 원시적인 수준을 넘어 작동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화폐-가격이 우리의 모든 희소한 자원들—노동, 토지, 그리고 자본재들—을 소비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그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분야와 영역으로, 합리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서는 화폐 가격이 필수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미제스의 반박이 옳았음을 인정했고,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 내에서 합리적인 시장 가격 체계를 구축할 방법을 모색했으나 결국 헛수고로 끝났다.

러시아인들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 자신들의 "전쟁 공산주의"를 통해 공산주의식 화폐 없는 경제를 시도했으나, 러시아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목격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탈린조차 이를 다시 재현하려 한적이 없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국가들은 이 공산주의적 이상을 완전히 버리고 자유 시장, 자유 가격 체계, 손익 평가, 그리고 소비자 풍요의 증진을 향해 빠르게 전환해 왔다.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중앙 계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시장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주도한 것이 바로 경제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제학을 잘 모른다고해서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경제학은 전문 학문이고 대다수 사람들이 “우울한 과학”으로 여기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의 상태를 유지한 채로 경제 문제에 대해 시끄럽고 요란한 의견을 펼치는 것은 전적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적인 무지는 아나코-공산주의의 신조에 내재해 있다.

많은 신좌파주의자들과 모든 아나코-공산주의자들이 공유하는 광범위한 믿음, 즉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 소위 "포스트 희소성"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제학이나 생산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에 대해서도 같은 지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희소성 조건이 동굴인류의 조건보다 분명히 낫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 희소성이 만연한 세계에 살고 있다.

세상이 "포스트 희소성"에 도달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원할 수 있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너무나 넘쳐나서 그것들의 가격이 0으로 떨어졌을 때이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처럼 아무런 노력 없이, 노동 없이, 어떠한 희소한 자원도 사용하지 않고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획득할 수 있을 때이다.

아나코-공산주의의 반(反)이성적인 정신은 새로운 “대항 문화”의 권위자 중 한 명인 노먼 O. 브라운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위대한 경제학자 폰 미제스는 사회주의가 교환을 폐지함으로써 경제 계산, 나아가 경제적 합리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사회주의를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만약 폰 미제스의 주장이 옳다면, 그가 발견한 것은 반박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정당화일뿐이다... 미제스의 논거들에 대한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의 반박이 사회주의가 "합리적 경제 계산"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즉, 그것이 경제화(절약)라는 비인간적인 원칙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현대 지성사의 슬픈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죽음을 거스르는 생명, 랜덤 하우스, 페이퍼백, 1959년, 238–39쪽) 

“자유”와 변덕을 위해 이성과 경제학을 버리는 것이 현대적 생산과 문명을 무너뜨리고 우리를 야만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사실조차 우리의 아나코-공산주의자들과 새로운 “대항 문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원시주의로의 회귀가 모든 인류에게 굶주림과 죽음을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극심한 궁핍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들이 그 길로 가게 된다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유쾌하고 “억압받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대한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지혜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소요 사태에서, 폭도들은 빵을 찾아 나서며,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단은 빵집을 부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대중이 자신들을 지탱해 주는 문명에 대해, 더 크고 복잡한 차원에서 취하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은 “그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문명의 이점들을 누리고 싶으면서도 문명을 지켜내는 일에 신경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당신은 끝장난 것이다. 순식간에 당신은 문명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 한번의 실수만으로도, 정신을 차려보면 모든 것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순수한 자연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뒤로 젖혀진 것처럼, 원시림이 본래 모습으로 드러난다. 정글은 언제나 원시적이며, 반대로, 모든 원시적인 것은 그저 정글일 뿐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뉴욕: W.W. 노턴, 1932년, 97쪽)


1) 역자주: 1960-70년대 당시 신좌파와 일부 아나코-공산주의자들이 기술발전과 생산력 증대로 인해 “이제 인류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모든 물질이 넘쳐나는 ‘포스트 희소성’단계에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넘치는 물질로 인해 희소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 도달했으므로 사유재산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질이 넘치는 세계에서 자본주의와 국가시스템만 무너트린다면 누구나 원하는 만큼 물건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포스트 희소성이다. 



썸네일 출처: GEM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