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lph Raico * 랄프 라이코(1936-2016)는 버펄로 주립대학에서 유럽사 명예교수이자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이었다. 그는 자유의 역사, 유럽의 자유주의 전통, 전쟁과 국가의 부상의 관계에 관한 전문가였다. 

주제 : #세계사 원문 : The Dutch Model of Secession, Commercial Freedom, and Religious Tolerance (게재일 : 2025년 6월 11일) 번역 : 전계운 대표


우리는 유럽 발전의 긍정적인 사례이자 모델로 네덜란드 실험(experiment)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저지대 국가들ㅡ즉,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오랫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던 부르고뉴 공작들로부터 물려받은 법률 체제의 혜택을 누려왔다. 이들은 삼부회(Estates-General)와 협력하여 통치한 지배자들이었다. 삼부회란 모든 신분의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 다시 말해 귀족, 평민 때로는 성직자라는 법적 범주를 대표하는 자들이 모이는 회의다. 부르고뉴 공작들과 삼부회의 법률들(acts)은 재산권 보호를 바탕으로 한 개방적인 상·공업체제를 촉진시켰다. 당연하지만, 삼부회는 재산을 소유한 계급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가 북부 네덜란드나 연합주(United Provinces) 혹은 홀란드라고 부르는 곳의 부상은 분권화라는 유럽의 기적이 작동하는 거의 완벽한 사례를 보여준다. 첫째, 이 지역은 수세기 동안 유럽의 경제·정치·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도래했을 무렵에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던 지역인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청어잡이 어선단은 유럽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쳤고 속담에서 등장할 정도였다. 청어잡이 배는 단순히 청어를 잡는 데만 그치지 않고, 즉석에서 손질하여 소금에 절이고 상자에 포장해 앤트워프나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납품할 수 있게 준비했다. 이는 중세 말기에 엄청난 자본 투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말을 안듣는 신민들을 손보기로 결심했는데 특히 오늘날의 네덜란드 지역에 있던 이들을 손보기로 했다. 이들이 감히 칼빈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쁜 점은 이들이 스페인 왕조의 제국주의적인 계획과 야망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세금을 내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었다.[note] 라이코는 여담에서 자신이 스페인 합스부르크(the Spanish Habsburgs)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the Austrian Habsburgs)를 구분한다고 설명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기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서는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밝힌 반면,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칭찬할만한 점이 적었다고 언급했다.[/note]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토 가운데 가장 생산적인 지역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세금들이 각 지방의 의회의 동의 없이 부과되었고 개신교를 뿌리 뽑기 위해 스페인 종교재판도 도입되었다.

이는 네덜란드 반란으로 이어지게 했는데, 이는 근대 역사상 최초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네덜란드의 반란은 유럽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오랜 기간동안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분리 독립에 성공했다. 참고로, 이는 미국 남부 연합국의 분리 독립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분리 독립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 제국을 장악하려 한 것이 아니라 미국 식민지인들이 영국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것처럼 스페인 제국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수십년에 걸친 매우 긴 투쟁 끝에 네덜란드인들은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다. 이들이 세운 체제는 이후 수십년 동안 유럽의 모델이 되었으며 최초의 유럽 경제 기적 또는 “비르트샤프츠분더(Wirtschaftswunder,  역자주: 경제 기적 혹은 경제 부흥이라는 독일어 의미)”였다.[note] 라이코는 여기에서 네덜란드의 경제 부흥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더 잘 알려진 독일의 경제 기적에 견주고 있다. [/note]

이곳엔 왕이 없었고 궁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주(provinces)를 위한 연합 의회가 있긴 했지만, 홀란드(Holland)나 흐로닝언(Groningen) 같은 각 여덟 개의 개별 주들은 이 연합 의회에 대표를 파견했고 이들은 본국의 대표자들이 동의하기 전까진 어떤 안건도 통과시킬 수 없었다. 즉 모든 것이 매우 분권화 된 체제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상업 엘리트, 즉 암스테르담과 다른 도시들의 시민(burghers)들이 지배했다. 짧은 시간 안에 이곳은 이전보다 훨씬 더 번영하게 되었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홀란드라고 부르는 지역은 핵심적인 주였기 때문에 때로는 나라 전체가 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유럽의 사실상 어느 곳의 빈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이 사례가 유럽 분권화 모델의 완벽한 운영 사례라고 내가 말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네덜란드가 스페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유럽이 이미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었다면 네덜란드는 손쉽게 짓밟혔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다른 독립된 지역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고, 결국 필리프2세가 영국을 상대로 무적함대를 파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영국은 개신교 국가일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반란군에게도 지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롭게 수립된 네덜란드 공화국은 점점 더 번영해가고 있다. 네덜란드는 유럽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인구의 3분의 2가 프로텐스탄트ㅡ칼뱅주의 신자였고, 대략 3분의 1정도가 여전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는 대체로 상인들이 주도했는데 상인들은 종교적이든 여타 다른 이유로 고객을 죽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법적차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일반적인 관용이 자리잡았다. 네덜란드의 인쇄업자들은 그 당시에 극단적이라 여겨졌던 것들, 특히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저작물까지 포함하여 사실상 무엇이든지 기꺼이 인쇄해주었다. 

네덜란드 인쇄업자들이 신경 쓴 것은 단 한가지었다. 바로 대금을 치뤘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어로 출판한 뒤 그 책을 프랑스로 밀반입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홀란드는 모두가 인정하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여기에서 한 미국 역사학자가 이렇게 썼다. 

외국인과 네덜란드인 모두 네덜란드 공화국이 종교, 무역, 정치 분야에서 전례 없는 자유를 허용하는 유일무이한 국가라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바로 이러한 자유와 경제적 우위의 결합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진정한 기적을 이루는 요소로 여겨졌다.[note] Koenraad Wolter Swart, “The Miracle of the Dutch Republic in the Seventeenth Century” (lecture, University College London, November 6, 1967, http://www.dianamuirappelbaum.com/?p=583#.ZEb-DHbMJD9).\[/note\]

네덜란드 공화국의 한 가지 특징은 종교의 이단자들과 존 로크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의 이단자들을 받아들여 이들이 한동안 머물게 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베리아 출신의 유대인들, 즉 추방당한 포르투칼과 스페인 유대인들도 받아들였고, 이들은 앤트워프나 아주 유명해진 암스테르담에 중요한 유대인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바로 이 암스테르담 출신 유대인 바뤼흐 스피노자가 이렇게 썼다. 

암스테르담 시는 이 자유와 그 자체의 큰 번영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누리며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 이처럼 가장 번성하는 국가이자 가장 화려한 도시에서 모든 민족과 종교의 사람들이 엄청난 조화 속에서 함께 살아가며, 동료 시민에게 재화를 맡길 때 상대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그리고 대체로 정직하게 행동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만 묻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다.[note] Quoted in Lewis Samuel Feuer, Imperialism and the Anti-imperialist Mind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1989), p. 65.[/note]

다시 말해, 네덜란드는 상업이 관용을 낳고, 조화를 낳고, 상호 이익을 위한 교류 의지를 낳은 사례다. 여기서 우리는 이타주의자들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이 발견한 것은 사유 재산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모두의 이익을 위한 평화로운 교류의 법칙이었다. [note] 라이코는 비꼬는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그냥 곁다리 이야기지만, 다들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문화를 파괴합니다. 자유시장은 모든 문화의 적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네덜란드인들은 회화 분야(painting)에서 그 어떤 것도 결코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는 이어 진지하게 말한다.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고는 소금에 절인 청어가 담긴 통 옆, 잡화점에서 그것들을 팔곤 했습니다. 매우 부르주아적인 사회였지요. 장 자크 루소는…네덜란드를 혐오했습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가서 누군가에게 시간을 물어보면, 그들은 그것에 값을 받으려 든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 눈에는 그게 전혀 잘못된 일로 보이지않습니다.”[/note]아마도 알고 있겠지만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는 꽤 오랫동안 존속했고 네덜란드의 번영과 명성에 크게 기여를 했다. 이 공동체는 안네 프랑크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그때 폭력적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다음 시간에는 네덜란드 모델을 다른 유럽인들이 어떻게 보고 채택했는지 살펴보겠다. 몇 분 전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존 로크는 정치적인 박해 가능성 때문에 영국을 떠나야 했고, 네덜란드인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웠다. 


썸네일 출처 : https://www.wikiwand.com/ko/articles/%EB%84%A4%EB%8D%9C%EB%9E%80%EB%93%9C\_%EB%8F%85%EB%A6%BD%EC%A0%84%EC%9F%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