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vid Gordon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주제 : #정치철학과_윤리학 원문 : Murray Rothbard's Philosophy of Freedom 번역 : 김경훈 연구원 [2편] 사유재산의 정당성 [3편/完] 자유주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
머레이 라스바드의 정치철학은 단순한 통찰력에 기초해있다. 바로 노예제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다. 이 명백한 진실에 감히 도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진실의 의미가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모든 정치철학자 중에서 라스바드가 유일하게 보유한 장점은, 노예제를 거부하는 것이 곧 정부의 가장 사소한 간섭에도 제약받지 않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로 이어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노예제를 거부하는 것은 곧 각자가 자신의 몸을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노예제도가 부도덕한 이유는 노예주인들이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들의 몸을 통제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하고, 노예가 복종을 거부한다면 말을 들을 때 까지 강제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노예제의 특징이 현대 사회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1865년 미국의 제13차 헌법 개정안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확실히 오늘날에 노예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중요성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론은 너무 성급할지도 모른다. 노예제의 본질이 타인을 위한 강제노역이라면, 오늘날에도 노예제는 매우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정부가 당신이 번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가져갈 때, 그것은 사실상 당신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예는 자기가 생산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주인에게 넘겨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납세자는 자신의 몫의 일부를 정부를 위해 포기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일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세금을 면할 수 있다고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 어떤 식량도 공급받지 못하는 댓가로 노예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노예제도가, 보통의 노예제도 보다 많은 개선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소득세가 국가를 노예주인으로 군림시키는 유일한 영역인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당장 미국인들은 강제 징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미국 정부 역시 군 복무를 직접적으로 강제하는 징병제를 운영하였고, 그러한 법은 언제든지 다시 제정될 수 있다. 강제 군 복무를 하는 사람은, 비록 그러한 복무를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끝장낼 수 있을지라도, 당연히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누군가는 이러한 결론이 너무 성급하다고 반론을 내놓을 수 있다. 소득세와 징병제와 같은 조치는, 아무리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더라도 결국 민주적으로 선출된 입법부에 의해 제정되었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노예주인이 원하는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수 있는 제도와 비교할 수 있다는 말 인가? 민주주의 제도에서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규칙을 선택한다.
라스바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예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에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노예주인 역할을 할 뿐이다. 개인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한, 그는 그만큼 노예다. 그가 그의 동료 노예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결정하는 데 있어서 한 몫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부자유스럽다는 점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라스바드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각자가 다른 모든 사람의 몫을 소유하는 제도이며, 단지 노예제도의 변형일 뿐이다. 우리는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자기소유권 혹은 노예제 중 하나를 더 선호해야만 한다.
많은 책과 논설문에서 라스바드는 자기소유권에 대한 방어를 완전히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행했다. 약간의 논쟁의 여지는 있더라도 말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다면, 당신은 국가에 대한 지지 의사에 반하여 강제당할 수 없다. 설령 국가가 지신의 활동을 오로지 권리 보호에만 제한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세금을 통해 자원을 갈취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권리를 침해한다. 게다가, 자유사회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쟁적인 보호기관을 설립할 자유가 있다. 그들의 보호가 독점 기관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자기소유권의 원칙은 상식적인 명백한 진리로 제시되어 왔지만, 라스바드는 이 사안에서 무언가 문제를 남겨두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기소유권을 논증함에, 라스바드는 한가지 명백한 사실에 크게 의존한다. 모든 사람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한다면, 나는 항상 그가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내 길을 스스로 개척하여 그가 폭력으로 위협한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비록 라스바드가 그러한 의지를 멀리할 수 없다고 말한 점에 옳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의지가 소외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각자가 자기소유자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윤리적 판단이 유도되는 것인가? 라스바드는 여기서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도출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인가?
그러나 라스바드는 이러한 가상의 반대자에 분명히 항의할 것이다. 그는 정말로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가 어떠한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는 윤리적 원칙이 곧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윤리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현대 철학의 많은 의견과 충돌한다. 라스바드는 그와 자주 대립하는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가 제기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스트라우스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그 후계자들이 개발한 '사실-가치 이분법(fact-value dichotomy)'이 하나의 인위적 구별이라고 주장하는 '일상 언어(ordinary language)'에 호소한다. 예컨대, 당신이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 새치기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는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았는가? 그가 무례했다는 판다는 주관적 의사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면서도, 확실히 '무례함'은 가치판단이다. 그렇다면 사실-가치 이분법 주장은 어떻게 된 것인가? 라스바드와 스트라우스가 선호하는 견해에 따르면, 가치판단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훨씬 더 논란이 되는 사안이긴 하지만, 만약 인간이 번영하기 위해 특정한 것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입각한 진술인 동시에 가치판단인가? 어찌되었건, 라스바드는 그렇게 주장했다. (나는 이 글에서 라스바드 주장의 개요만을 제공하고자 하며, 그것에 대한 완전한 변호는 하지 않을 것이다.)
라스바드의 입장은 아마 현대 분석철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소수에 해당하지만, 몇몇 선도적인 학자들이 여전히 지지한다. 영국의 영향력있는 철학자 필리파 풋(Philippa Foot)은 그녀의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 Oxford University Press, 2001)'에서 라스바드와 상당히 유사한 관점을 옹호한다. 그리고 심지어, 라스바드의 논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사실과 가치 사이의 무수한 격차가 구별된다고 믿는 경우에도, 자기소유권은 노예제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법칙으로 남아 있다.
